전체를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둘이 아닌 그것을.
전체를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이원성의 본성인 그것을.
전체를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영원이며 영원이 아닌 그것을.
나는 지식의 감로이며, 저 하늘같이 순일純一의 존재이니.
<아바두타 기타>
자신을 한정된 고착으로 여기는 동일시에서 벗어나 자신이 순일의 존재임을 진정으로 깨닫는 것은 가장 희귀한 일이었다. 자신의 진정한 본성으로 깨어난 극소수의 사람들은 시대를 초월하여 찬양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사람이 그들처럼 깨어날 수 있다. 우리는 요기나 성자로 태어날 필요가 없다. 참된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지금까지 진실이라고 믿고 있던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겠다는 의지뿐이다. 이러한 전적인 의지 없이는 그 어떤 수행이나 기술로도 성공할 수 없다. 진리를 찾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온 우주는 약이 되어 우리를 깨어나도록 돕는다. 그러면 에니어그램은 고착화된 마음이라는 환상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아주 강력한 약이 될 수 있다.
진정한 우리 자신은 이미 지금 여기에서 우리 자신으로 존재하고 있으므로 자기를 찾으려는 어떠한 탐구도 잘못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된다. 찾으면 찾을수록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우리가 이미 여기에 있는 것을 기꺼이 보려고 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을 한정된 존재라고 여기는 생각에서 가장 빨리 벗어나는 방법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처음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의 몸과 정서의 몸에 대한 것이다. '움직인다'는 것은 고착의 반응 양식에 따라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생각의 물결을 따라가는 것이다.
신성한 아이디어
사실은 어떠한 아이디어도 신성하지 않으며 길이라는 것도 없다. 신성한 것은 모든 아이디어의 너머에 있으며 어떠한 길을 통해서도 진실한 자기 자신에 도달할 수는 없다.
자기 자신을 찾으려는 어떤 행위도 사실은 자기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거기에는 자기의 바깥에서 어떤 미래에 자기 아닌 다른 무엇을 찾아다니는 행위자가 있을 뿐이다. 찾고자 하는 참된 진실은 오직 지금 여기에 이미 우리 자신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탐구에서 놓치고 있는 것은 탐구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실제로 조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에니어그램에서 신성한 아이디어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신성한 아이디어는 자기 자신을 초월하겠다는 갈망과 자기를 분리된 개별 실체라고 믿는 모든 관념을 버리겠다는 갈망을 불타오르게 하는 힘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자아의 마음이 모든 관심을 마음 너머의 것을 찾는 데 집중하도록 해 준다. 신성한 아이디어는 자아를 초월하는 아이디어이다. 신성한 아이디어는 자아의식의 관심을 사로잡아 자아를 소멸시키는 데 초점을 맞춘다. 몸, 마음, 정서를 포함하는 온전한 존재가 자유를 간절히 열망할 때, 비로소 신성한 아이디어의 가치는 실현될 수 있다.
모든 고착에는 신성한 아이디어가 있는데, 대개는 이 아이디어를 자신의 고착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한다. 신성한 아이디어는 초자아에게 사로잡히게 된다. 이 초자아를 가장 쉽게 이해하는 방법은 자아의 마음이 이원성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인간과 신이라는 근본적인 이원성은 행위자와 행위자를 판단하는 재판관이라는 개념으로 내면화된다. 자기 자신을 인간 행위자라고 보는 개념이 고착화되고, 신은 초자아의 재판관으로 내면화된다. 이 내면화된 신과 자신과의 대화는 자아 구조를 유지시킨다. 초자아의 역할은 한계를 설정하고, 불만족스럽다는 느낌과 수치심을 낳으며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행위자와 재판관 사이에 전쟁이 발생한다. 우리가 흔히 정상적인 삶이라고 여기는 상태는 사실은 이러한 전쟁 상태이다.
초자아는 행위자를 심판하는 데 신성한 아이디어를 이용하고, 행위자는 욕망의 추구를 정당화하는 데 신성한 아이디어를 이용한다.
* 4번의 신성한 아이디어는 근원이다. 참된 근원은 모든 존재의 불성佛性이다. 존재의 바탕은 진실하고 텅 비어 있는 지식이다. 자신이 모든 것의 근원이라는 것을 알면 참나를 깨닫게 된다. 어떠한 생각도, 어떠한 형태도, 어떠한 움직임도 근원에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어떠한 생각이든, 어떠한 형태이든 혹은 어떠한 움직임이든 텅 빔에서 일어나는 것은 모두가 텅 빔으로 만들어졌으며 텅 빔으로 되돌아간다. 이것을 깨닫게 될 때 깨달은 존재는 어떠한 생각이나 형태나 움직임이나 혹은 그것들의 부재와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 4번이 근원이라는 아이디어를 사용할 때는 "내가 어디에 있건 근원은 분명히 다른 어딘가에 있을 거야."라면서 근원을 다른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 4번들이 충족을 위해 끝없는 정서적인 탐구를 정당화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믿음을 통해서이다.
신성한 길
* 4번의 신성한 길은 평정이다. 평정은 정서의 몸에서의 균형이다. 그러나 평정을 수련할 수는 없다. 어떤 수행이든 내면의 깊은 층에 있는 경험되지 않은 정서들을 억누를 것이다. 4번들은 감정의 기복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에 평정을 생기 없이 무감각한 것으로 생각한다. 4번의 정서적인 미숙함 속에는 평정에 대한 큰 두려움이 있다. / 참된 평정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우선 고통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다. 이런 의지 없이는 어떤 것도 성공할 수 없다. 고통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를 기꺼이 포기하고자 한다면, 이제까지 회피해 왔던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서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 감정에 중독된 4번은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고통의 끝을 찾는 성숙의 단계에서 감정을 개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지는 부정적인 감정의 뿌리까지 내려갈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표면적인 슬픔과 분노와 두려움 아래 그 밑바닥에 깊은 절망이 블랙홀을 덮고 있다. 블랙홀로 들어감으로써 우리는 그곳을 통과하여 건너편으로 갈 수 있다. 블랙홀 너머에는 자신의 이야기와 정서적인 집착을 통해 궁극적으로 찾고자 했던 자신의 본성이 있다. / 자신의 참된 본성을 깨달으면 수행할 수도 없고 모방할 수도 없는 자연스런 평정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참된 평정의 상태에는 맑은 의식으로 참나를 탐구하며 계속 더 깊이 꿰뚫을 수 있다.
본질의 속성
우리는 영혼을 빛나게 하기 위해 혹은 본질을 축적하기 위해 노력할 수는 없다. 오직 기꺼이 이기심을 버리려 할 때, 겉으로 보이는 우주가 참된 실재가 아님을 아는 초월적인 지혜가 저절로 드러난다. 이러한 계시에 참으로 머무르면 본질은 저절로 빛을 발한다.
미묘한 몸 혹은 영혼의 본질은 개인이 일생을 사는 동안 여러 시험들을 거치며 드러난다. 개인이 자신을 깨달았든 깨닫지 않았든 간에 영혼의 본질은 분명하게 빛나고 있을 것이다.
특정 고착은 순수 본질을 가리는 베일이며, 본질의 모방이며, 영혼을 시험하고 발전시키는 도구이다. 각각의 고착은 본질의 다양한 성질에 대한 모방이다.
블랙홀 : 희열과 절망
정서의 몸은 뚜렷하게 드러나는 세 종류의 몸 가운데 하나이다. 정서의 몸은 감정과 잠재된 경향성들의 바다이다. 이것은 과거 모든 삶의 감정의 물결들이 감정의 바다의 수면 아래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뜻이다. 이 파도는 다양한 수준들의 경험되지 않은 감정들로 이루어져 있다. 바다 깊이 잠기면 이제까지 회피되어 왔던 감정의 층들을 발견할 수 있고, 모든 제한된 층들과 물결들의 저변에 깔린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바다 깊이 잠기다 보면 이제까지 회피되어 왔던 감정의 층들을 발견할 수 있고, 모든 제한된 층들과 물결들의 저변에 깔린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바다 깊이 잠기다 보면 위험한 이것들을 직면해야 한다. 윤회의 바다를 건너려면 욕망의 모든 파도 아래로 잠겨야 한다. 피안彼岸은 바다의 밑바닥에서 발견된다.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려면 텅 빔과 의식적 사랑이라는 자신의 진실로부터 자기를 분리시킨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을 기꺼이 경험하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내면으로 뛰어들 때, 동면하고 있고 잠재의식적이며 잠재되어 있는 요소의 겹겹이 쌓인 모든 층들을 우회할 수 있다. 하지만 동면하고 있는 층들은 여전히 거기에 남아 있을 것이며 당신이 이 세계로 다시 되돌아오는 길에 경험해야 할 것이다. 만약 사랑의 은총으로 당신이 자신의 심연에서 다시 떠오르지 않는다면, 이 모든 잠재된 성향들은 경험되기 위해 나타나고, 깨달은 마음의 신성한 불 속에서 재가 될 것이다. 만약 자아동일시가 다시 나타나면, 마찬가지로 모든 잠재된 성향들은 떠올라서 경험되고 재로 변하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물의 표면에만 의지하며 살아간다. 이것은 "모르는 것이 약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가장 피상적인 수준에서는 상황에 관한 이야기를 개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작은 상처들이나 좌절감이나 초조감이나 신경과민이나 그 밖의 다른 감정들이 일어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내면의 대화와 외적인 대화가 결합되어 만들어 내는 기분과 감정에 휩쓸리면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끝없이 되풀이하며 계속하여 비난받는다고 느끼거나, 비난을 하거나 혹은 상처를 받는다고 느낀다. 이러한 피상적인 수준 아래에는 조사되지 않은 정서들이 있는데, 그 정서들은 일어나는 모든 일에 완전히 현존할 때의 경험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는 완충기로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블랙홀은 제한된 정서의 몸에서 무한한 본질로 들어가는 출입구이다. 블랙홀 속으로 뛰어들면, 자아와의 모든 동일시를 끝내고 본질을 직접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러한 통찰력을 무엇인가를 얻거나 부정적인 정서들을 느끼지 않으려는 기교로 이용하고자 한다면, 이 약은 다시 독이 되고 고착은 계속해서 삶을 움직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매 순간 멈춰 서서 바로 여기 있는 모든 것을 완전하게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우리가 기꺼이 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내면의 중심으로 내려가 텅 빔을 거쳐 마음과 정서의 모든 층을 경험할 수 있다. 특별한 장소나 준비는 필요하지 않다. 오로지 모든 것에 직면할 의지만 있으면 된다. 오직 이렇게 직면할 때에야 우리는 '나'라고 믿는 모든 파도가 실제로는 전혀 실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대는 자신의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일이 어떤 무엇에 의해 행해지고 있으며, 자신이 그것과 하나로서 깨어 있음을 깨닫는다. 마음은 의심과 선택으로부터 자유롭다. 마음은 진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마음은 실재의 현존을 느낀다. 마음은 활동할 때에도 자신이 실재와 참나와 지고의 존재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라마나 마하리쉬>
<영혼의 자유 에니어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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